우리 집 담장 너머에는 조그만 텃밭이 있다. 물론 나는 라면이나 끊여먹을때 나가서 파한뿌리 뽑는게 전부인 곳, 내 노동이 투여되지 않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노력과 공이 들어간 텃밭이다.
최근 뒷 창문으로 줄기 하나가 올라오는 놈을 우현찮게 봤는데 바로 호박이었다. ‘어라 이놈이 우리 집까지 넘보며 슬금슬금 기어오네’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잊어버리고 있다가 며칠 뒤 우연찮게 다시 그 호박을 봤더니 어느새 주먹만해져 있어서 생명력에 감탄하며 그 뒤 텃밭에 있는 다른 호박들을 가끔씩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비슷한 시기에 밥상 위에도 호박음식들이 자주 올라왔다. 아내는 호박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있으니깐 자주 하게 된다며 호박감자국, 호박찌개, 호박전등 호박이 주메뉴인 음식을 비롯하여 아무 음식에나 마구 호박을 넣어댔다.
또 호박잎은 자매품으로 계속 올라온다. 사실 나도 호박을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 거의 매일 호박요리가 나오니 더 싫다.
예부터 못생긴 얼굴을 호박에 비유한다. 하지만 난 그 못생긴 호박에 최근 정감이 가기 시작했다. 텃밭에서 호박은 대접받지 못하는 존재다. 그 누구도 와서 관심을 갖고 퇴비를 주지도 돌봐주지도 않는다. 그저 여기에 있어도 되겠다 싶은 곳에 호박은 자기가 알아서 줄기를 내밀어 간을 본 다음 주리를 틀고 앉아 있는 것이다.
자신 앞에 장애물이 있든 상관없이 서슴지 않고 덤벼들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내는 번식력은 말할 것도 없고, 한번 자리를 잡으면 기척도 하지 않고 오랜 시간 묵묵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 인내력도 대단하다. 소박하다 못해 미련스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그 전투력 또한 가히 높이 살만하다. 무식하면 힘만 세다고 했던가 올 여름, 가을 자기스스로 번식하는 호박을 보고 있자니 그 맛보다 그 거친 생명력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요즘은 호박이 한창 누렇게 익어가고 있다. 이제 늙은호박을 수확할 시기라고 한다. 딸아이는 벌써 농기구에 심취해서 낫 들고 호박 캐고 싶어서 안달이다. 이미 몇 주전 사촌언니들과 호미 들고 고구마를 캐본 경력자였던 것이다. 낫은 너무 위험하니 다른 것을 쥐어주며 이걸로 호박 찾아보라고 달래며 열심히 늙은호박들을 수금하였다.
큼직한 늙은 호박을 수두룩하게 거두고 나니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왔다’는 옛말이 실감났다. 애정 갖고 재배한 것도 아닌데 이리 큰 수확물을 얻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또 고민에 빠졌다. 나름 비장하다. “이 늙은 호박으로 뭐 하지…?”
늙은 호박으로 호박죽은 물론 떡, 부침개, 김치, 식혜, 고추장, 양갱 등등 한동안은 이것저것 해먹을 수 있다. 하지만 뭐니 뭐니해도 호박죽이 으뜸. 늙은 호박 중간 크기(5~6kg) 하나면 대략 40~45인분의 호박죽을 끓일 수 있다 하니 이번에 수확한 호박이면 마을 잔치를 하고도 남을 판이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여럿을 먹일 만큼 넉넉한 결실을 맺는 호박. 어쩌면 우리들 각자 삶 속에 녹아 있는 꾸준한 그 무엇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 10잔 물 마시기 랄지, 일년에 책 12권은 읽기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인간답고, 자유로우며,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사회가 더 나은 세상이라는 믿으며, 꾸준한 1%나눔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 역시 저 여문 호박과 닮지 않았나 싶다.
단단하게 여문 늙은 호박처럼 매력적인 <1%나눔> 더보기
글 | 김학석 간사